2026. 4. 4. 05:45ㆍme



잃고 난 뒤 후회하는 게 서러워서 이제는 그때그때 표현하려고 한다... 좋다고 잘하고 있다고 그러니까 오래 해(살아)달라고

살아가려면 사랑하는 수밖에
물건을 넣으면 무작위로 다른 물건이 되어 나오는 미끄럼틀을 다룬 <띠부띠부 랜덤 슬라이드>, 가장 좋아하는 아이돌이 포토카드를 뚫고 나와 동거하는 <여분의 해마>, 평행세계를 그린 <유예하는 밤> 등. 수록된 대부분의 소설들은 평범한 일상에 환상성을 절묘하게 덧입힌다.
작품 속 화자들은 대체로 우울과 절망, 체념에 갇혀 삶의 의욕을 상실한 채 하루를 살아내는데, 환상적인 장치가 작가가 이들에게 전하는, 더 넓게는 책 너머 독자들에게 전하는 최선의 선물 같이 느껴진다. 더불어 작가는 이들을 끝내 각자의 방식대로 삶을 이겨 내게 하고 작지만 단단한 의지를 불어넣어 준다. 끝없는 낙담의 늪에서 기어코 한 걸음 내딛는 인물들로 인해 괜스레 위로 받았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수록된 <다음 챕터>가 아주 묵직한 의미로 다가온다. 마침내 다음 챕터를 살게 될 주인공으로 인해, 나 또한 곧 찾아올 다음을 기다리게 된다.
수록작 중 <들개들의 트랙리스트>가 가장 마음에 남았는데, 김중혁이나 김애란 같은 2000년대와 2010년대를 풍미했던 작가들을 떠올리게 해서 그랬다. 소재와 전개가 그때의 향수를 자극했다. 입시했을 당시, 그들의 작품들을 주로 읽었는데 글에 대해 가장 열정적이었던 때라 괜히 그때가 떠오르면서 예상치도 못한 새로운 형태의 자극을 받았다.
무엇을 열렬히 사랑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완벽하게 몰입할 수밖에 없는 감정선을 탁월하게 짚어내는 소설집이다. 특히 아주 깊게 덕질을 해 본 사람들이라면 더욱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동시대적인 소재로 보편적인 애정과 환상적이지만 소박한 구원을 그려 냈다는 점에서, 요즘 사람들이 읽어야 할 현대 문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도 결국 사랑을 잃지 않는 이들. 그리고 이들을 향한 작가의 시선이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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