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30. 12:53ㆍme





<뼈만 남았다>
- 에세이
지금부터 적어나갈 문장들은 비유적 의미로서의 ‘뼈만 남았다’에 붙어 있는, 뼈 이외의 것들과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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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도감을 넘기다 보면 ‘깊은 산 우거진 숲속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이다’라는 문장을 만나게 된다. ‘여러해살이풀’이라는 말을 되뇌다 보면 묘하게 위안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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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도리카와 유키의 『나츠메 우인장』은 매 화가 시작될 때마다 인트로를 반복한다. “어릴 적부터 이따금 이상한 것을 보곤 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그것들을 아마도 요괴라 불리는 괴물ㅡ”로 시작되는데 거의 5-6페이지에 달한다. 매 화마다 반복되는 설정을 따라가다 보면 지루한 면이 없지 않지만 작가는 이번 화에 시작될 에피소드의 시작점을 교묘하게 설정 패턴에 밀어 넣는다. 아주 자연스럽다. 그렇다 자연스럽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새로운 에피소드가 시작된다. 삶이 그런 것처럼.
작가는 분량을 채우기 위해 설정을 패턴화하는 방법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요령 있다고 해야 할까. 알면서도 나는 감동받는다. 그건 작가가 삶에 대해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매번의 삶이 차질 없이 진행되고 색다르게 변주된다.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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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잘 살아지는 건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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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가 되고 싶어서 방과 후에 교실에 남아 그림을 그렸던 적이 있다. 한 편의 그림을 완성한다는 것은 크레파스 냄새를 오래 맡고 있어야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크레파스 냄새에 적응하지 못했다. 지금에 와서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건지, 화가가 되고 싶었던 건지 잘 모르겠다. 여하튼 그림을 잘 그리지도 못했고 오래 그리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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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조 모란디. 그를 알게 된 건 『릿터』 4호 「서경식의 인문기행」 볼로냐 편에서다. “그는 볼로냐의 폰다차 거리에 있는 아틀리에의 어둑어둑한 방에 틀어박혀 병과 항아리를 질리지도 않고 거듭해서 그리면서 지냈다”는 문장을 봤다. “1964년 고향 볼로냐에서 삶을 마친 모란디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고 함께 살았던 세 명의 누이동생이 그를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는 문장도 있었다. 두 문장을 통해 위안을 받았다. 누군가의 고독한 예술적 삶에 위안을 받는 일은 일면 잔인한 구석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대상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삶을 탕진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대상을 질리지도 않고 표현하며 자신의 일상과 예술을 지켜낸 모란디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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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비난하며 지낼 때 너에게 나를 설명할 수도 있었다. 네가 간과한 부분과 네가 넘겨짚은 부분과 네가 동일시한 부분에 대해. 하지만 동시에 알고 있었다. 설명하고 나면, 설명을 통해 관계를 낱낱이 분석하고 나면 관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나에 대한 너의 비난이 시간과 함께 무뎌지면서 이해해 다다르기를. 그 지난한 과정을 견디는 게 어떤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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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모르지 않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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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츠메 우인장』 제2화 「츠유카미」 편에 나오는 츠유카미는 사당에 더부살이하던 요괴다. 가뭄이 심하던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은 사당에 모여 기도를 하고, 다음 날 비가 내리자 사당의 신에게 츠유카미❲露神❳라는 이름을 붙여주며 공물을 바친다. 신앙으로 부풀어 오른 몸을 가진 츠유카미는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에게 점점 잊히고 한때 사람의 크기만 했던 몸이 귤만 해진다. 어릴 때 찾아왔던 하나라는 여인만이 잊지 않고 찾아주어 몸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하나가 늙고 병들어 죽자 소멸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잘나가던 시절, 공물이 언제까지나 들어오지는 않는다며 힘이 있을 때 거처를 옮기라는 충고를 “하지만 한번 사랑을 받으면, 사랑을 해버리면 다시는 잊을 수가 없는 거야”라는 말로 넘겨버렸던 츠유카미. 마음을 준 경험, 한번 준 마음에 길을 내어 죽을 때까지 그 길을 왕래하는 요괴와 인간. 이런 데서 위안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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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은 뼈를 발라내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분석의 대상이 사람이라면 더더군다나. 종종 앞에 있는 사람에 대해 분석하고 있는 나를 볼 때가 있다. 대상을 분석하고 있는 나를 다시 분석하고 있는 나. 분석이 끝나고 나면 결국 또 남김없이 발라먹었구나 하는 생각에 빠진다. 그냥 두었더라면 거기 남아있었을 것들이 훼손된다.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말하는 방법도 있겠지. 덜 말하면서 남겨둘 수도 있고. 말을 할 만큼 하고 나서도 지킬 것을 지켜내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여러 번 다짐했는데도 잘 안 된다. 또 시작이구나, 하는 심정으로 지켜보는 수밖에. 그럼 너는 앞에서 슬쩍 웃는다. 그 웃음이 위로가 되기도 하면서 상처가 되기도 한다. 네가 없었더라면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을 테니 나는 네가 언제까지나 거기 앉아서 슬쩍 웃어주기를 바란다. 웃는 너를 남겨두고 갔다,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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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조 모란디는 마을의 벼룩시장을 돌아다니며 그릇과 병을 구입했다. 침실 겸 작업실 한쪽 벽면 선반에 구입한 그릇과 병을 올려두고 매일의 작업을 이어갔다. 작업에 들어가기 전 그가 가장 공들인 부분은 그릇과 병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한두 개를 더하기도 하고 빼기도 하고. 뒤에 놓기도 하고 앞에 놓기도 하면서. 몇 개 안 되는 것들로 어제와 다른 혹은 내일과도 다를 삶을 구상한 것이다.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오늘. 오늘과 완전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오늘을 벗어나지 않는 오늘. 미묘한 차이를 지닌 수많은 오늘을 발생시키는 행위. 그런 ‘오늘’의 작업이라서 그는 멈추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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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있으면서 해야 할 일들을 하고, 만나야 할 사람들을 만난다. 여기에서의 잠을 잔다. 여기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데도 여기에 없는 상태에 있다. 멀리 가지 않고도 멀어진다. 격리감은 문장과 함께 지내기에 적합하다. 문장은 끝내 데려다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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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좋은 사람이야”보다는 “네가 좋아”라고 말하는 태도가 더 윤리적이다. “네가 좋아”가 안 되는 관계이거나 “네가 좋아”의 상태에서 놓여났다면 그만이다. 뭘 더 어떻게 해보기 위해 ‘너’를 ‘좋은 사람’에 가두지 않아야 한다. ‘너’를 놓아주어야 한다. 그걸 잘 못해서 일상이 엉망진창이 된다. ‘엉망진창’은 문장과 불화한다. 나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너’를 호명하는 일이 ‘너’의 일상을 뒤흔드는 일이 아니어야 한다. 그건 ‘너’와 함께했던 시간에 대한 예의다. 내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윤리다. 관계에 대한 숙고는 문장을 데려온다. 문장과 문장 간의 관계에 관여한다. 문장이 갈 길을 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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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에서 시작한다. 시작하는 문장은 ‘나의 감정’에서 나오기도 하고 ‘나의 경험’에서 나오기도 하고 ‘내가 처한 상황’에서 나오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나’에서 시작하기를 반복하고 나면 ‘나’는 거덜 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문장은 ‘장소’에서 시작된다. 장소에 앉아 있었다. 장소를 거닐었다. 달렸다. 너와 함께 있을 때 장소는 탈락한다. 우리와 있을 때 장소는 탈락한다. 혼자 남겨졌을 때 비로소 장소는 다시 나타난다. 나타난 장소를 한동안 더 내버려두면 장소는 장소의 본래적 모습을 되찾는다. 내가 휘저어놓은 장소가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면 장소는 문장이 되어 스스로 시작된다. 고유명사로서의 장소는 문장이 되기 어렵다. 고유명사로서의 장소는 자기주장이 강하기 때문인데, 내가 나한테 너무 몰입하면 문장이 되기 어려운 이유와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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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주장’은 한 단어구나.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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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는 반복해서 나타난다. 장소는 스스로를 탕진하지 않는다. 장소는 스스로를 속여 기만하지 않는다. 장소는 감정이 아니다. 장소는 감각도 아니다. 장소는 존재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며 현실이 사라진 후에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존재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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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디의 그림에 배경은 없다. 모란디는 그림에서 배경을 삭제했다. 그의 그림에서 그릇은 놓여 있다. 어디에 놓여 있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놓여 있다. ‘어디에’를 삭제했기 때문에 어디라도 상관없어진 상태. 나는 그의 그림에서 세상의 모든 장소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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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가 있다.
행위는 사람의 내면적인 정신 작용이 외면적인 신체의 활동으로 나타난 것 행동行動과 동일한 뜻으로 쓰이기도 하나 엄밀히 말하면 구별된다. ‘행동’은 단순히 몸을 움직여 동작하거나 어떤 일을 하는 것을 말하고, ‘행위’는 의식적·의도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아직은 행위가 아니고, 행동이다. 물리적 방향성은 지녔지만 아직 행동을 구현하는 주체의 목적은 드러나지 않은 상태의 움직임이다. 움직임으로 문장을 시작한다. ‘움직임으로 시작하는 문장’이 시를 주도한다. 어디로 어떻게 움직일지 아직은 모른다. 지켜볼 뿐이다. 문장이 문장의 의식 작용을 통해 움직인다. 매번 다시 움직임을 시작하며 가보는 데까지 가보는 행위를 통해 시는 지속된다. 지속적인 삶이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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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곳. 한 번 가본 곳일 수도 있고, 한 번도 안 가본 곳일 수도 있다. 구체적인 장소가 아닐 수도 있다. 혹은 이미 구체적인 장소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 삶이 됐든, 시가 됐든 그만두지 않으려면 살아가야 할 장소를 끊임없이 물색해야 한다. 세상 어디에도 그런 장소가 없다면 추상을 통해서라도 발생시켜야 한다. 지금부터 가게 될 장소가 지나온 과거의 단순 반복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 단순 반복 속에서, 혹은 단순 반복 속에서라야 살아진다면 장소는 무한히 반복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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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다 읽은 임승유. 마지막은 맨 뒤에 수록된 에세이인데 긴 글의 임승유는 귀해서 꼭 필사를 해야할 것 같았다. 글을 배운 지 오 년이 넘는데도 최애 시인 하나 없다가 작년에 임승유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두 시집에 완전히 반해버려서. 이 시집을 읽는 걸 계속해서 미룬 이유는 혹여 마음에 들지 않을까봐 하는 겁이 나서였는데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다. 임승유는... 임승유. 너무 좋다는 말은 이젠 진부해. 임승유의 문장, 행, 연 사이의 공백은 다른 시인들보다 더 넓게 느껴진다. 그런데 불친절한 공백이 아니다. 독자에게 멈춰서서 사유할 기회를 준다. 임승유의 그 무심한 듯한 친절이 너무 좋다. 이 시집은 앞서 말한 두 시집보다 더 공백이 많다. 그래서 더 많은 이들과 상황들이 떠올랐다. 사진집 같은 시집이었다. 임승유를 앞으로 더 사랑할 것 같은 확신이 든다. 빨리 다음 시집 내주세요...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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