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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들의 도서관 / 김중혁

미지로 2023. 3. 27. 20:33

20211110


나는 그저 모든 일을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었고, 지금에 이르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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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선생님이 '키치한' 문체에 대해 말씀하셔서 그 키치한 느낌이 대체 뭘까 생각했었는데 김중혁의 소설을 읽고 단번에 알았다. 저번에 <나와 B>를 읽었을 땐 너무 단순해서 조금 실망했었는데 이번에는 <유리방패>를 읽었을 때와 비슷한, 어쩌면 그보다 더 큰 감명을 받았다. 김중혁의 소설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문장이 단순하다는 것이다. 그의 소설은 거추장스러운 미사여구로 인해 길고 현학적인 문장을 거의 찾을 수 없다. 그런 문장들로 이루어진 소설들이 너무 많아서 피로를 느끼고 있던 와중 김중혁을 발견해서 어찌나 반가웠는지. 뚱딴지 같은 말로 시작해서 그걸 재치있게 풀어내는 작가의 재능이 부러웠다. 단순함 속에 담긴 단단함! '아무것도 아닌 채로 죽는다는 건 억울하다.'라는 첫 문장에 공감하다 결말을 향할수록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채로 죽는다는 게 더 어려운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은 독특하게 마치 미완성으로 끝난 느낌이 든다. 보통 마지막 문장은 첫 문장처럼 강렬하고 짧은 문장을 쓰는데 이 소설은 그냥 계속 이어질 것처럼 끝난다. 심지어 결말 또한 열린 결말이다. 개인적으로 열린 결말을 선호하는 편은 아닌데 이 소설로 인해 열린 결말이 주는 장점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화자의 다음과 더불어 나의 다음 또한 기대하게 만들었던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