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죽의 형상 / 권여선

N은 나와 대학 사년, 회사생활 사년을 함께하면서 거의 매일 점심을 같이 먹어온 친구이자 동료였지만 이제 와서는 왠지 선뜻 친하다고 말하기가 꺼려지는 면이 있었다. 주변 사람들 눈에 매우 절친해 보이고 본인들도 그렇다고 믿지만 어느 순간 시간이 그들을 떼어놓았을 때 다시는 영영 화합하지 못하게 되는 사이가 있다. 다시는 영영 같은 비극적인 뉘앙스조차 전혀 깨닫지 못하는 사이, 어느 쪽에서도 먼저 만나자는 약속 전화를 하지 않고 죽게 되는 사이 말이다.
결국 이렇게 흐르고 만다. 관계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나는 언제나 죽음을 전제하게 된다. 관계와 죽음이 언제부터 내 머릿속에 한쌍으로 자리잡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좋지 않은 버릇임엔 틀림없다. 관계의 끝만을 생각하다보면 누구와도 진심으로 사귀기 어렵다. 그래, 네가 어떻게 되나 지켜보자, 네 끝이 어떨지 두고보자는 식의 시선은 그 독으로 대상을 말라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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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전선이 북상했다.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자정쯤 잠자리에 들었다. 휴가 첫날 새벽 나는 끓는 기름에 물이 떨어져 지글거리는 것 같은 빗소리에 잠에서 깼다. 비는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번도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다는 과장된 피로감이 몰려왔다. 나는 자리에 누운 채 빗소리를 들었다. 따다닥 빗몸이 부서지는 소리도 들었고 부서진 빗물이 서로 섞여 흐르는 노래 같은 냇물 소리도 들었다. 빗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문득 빌소리처럼만 상대의 말을 경청했다면 내 삶이 지금과는 조금쯤 달라졌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단히 훌륭해졌으리라는 의미는 아니고 공들여 매준 밭의 흙처럼 조금은 더 보드랍고 포실했으리라는 정도였다. 빗소리는 가끔 자그마하게 짤랑거리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마치 장난꾸러기처럼 하늘의 손바닥과 땅의 손바닥이 물방울 구슬을 담고 짤짤이를 하는 소리 같았다. 어느 순간 빗소리가 내 안에서 짤랑거렸다. 견딜 수 없는 복통에 나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소낙비 같은 설사였다. 조금 더럽긴 하지만 휴가를 축하하는 축포가 터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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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족한 삼각뿔 모양의 뚜껑을 돌리자 뿔이 잘린 람각대 모양의 용기에 담긴 액체에서 어릴 때 자주 맡던, 코가 싸하고 목젖에 단맛이 느껴지는 냄새가 풍겨왔다. 뚜껑 대랑 끝에 매달린 뻣뻣한 솔은 펄이 섞여 현란하게 반짝이는 끈적한 용액에 흠뻑 젖어 있었다. 나는 왼쪽 엄지손톱부터 핏빛 매니큐어를 바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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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 작품의 특징은 초반에는 이야기에 쓸모없어 보이는 문장이 많아 보이는데, 중반부로 넘어가게 되면 그 문장들이 다 회수가 된다. 알고 보니 떡밥이었던 것. 그래서 초반부에는 굉장히 지루하고 언제 끝나냐 이러고 있는데 그 부분만 딱 넘기면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으로 빠져버리게 되는 나를 보게 된다. 이 작품 속 N에게서 자꾸 나의 S의 모습이 보여서 화자에게 몰입이 많이 됐다. 자신을 불안하게, 불쌍하게 만든다는 점에 있어서 S가 많이 생각났다. 그리고 어딘가 화자는 자신이 S보다 우위에 있다고 느끼는 것만 같은데, 둘이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 뒷자리에 앉은 남자가 화자의 머리를 살짝 때리자 N이 울며 "너 아프잖아. 너 아프잖아." 하는 장면에서는 어쩌면 N의 입장에는 자신이 화자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아무튼 간에, 멀어지는 관계에 관한 고찰을 어떻게 이리 깊게 쓸 수 있을까?
권여선의 작품에는 또 다른 특징이 있는데, 화자와 다른 인물끼리의 대립보다는 화자의 내면 속 자아와 부딪히는 장면이 더 많은 점이다. 아주 부럽다. 나는 화자 내면의 이야기보다는 화자와 인물들간의 관계에 더 치중을 하는 편이라서. 화자 내면의 이야기를 하게 되면 괜히 내 생각을 보여주는 것 같고 왠지 모르게 벌거 벗은 듯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권여선은 일상적인 장면을 아주 많이 넣는데 그 장면의 의미를 부여하는 게 너무 좋다. 당연한 일은 하나도 없고 모든 일에는 언제나 사유가 있다고 생각을 해서 이런 나의 생각과 작가의 생각이 일치하는 것 같아 반갑다. 최근 들어 권여선의 작품을 자주 읽었는데 아직도 더 알아가고 싶은 작가다. 다음엔 <문상>을 읽어볼겡.